2018 성균건축전에 관한 소고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졸업전시준비위원회. 소위 ‘졸준위’ 라고 하는 애매한 전통이다. 매년 다들 어떻게 모여서 하는지 놀라울 정도로 체계가 없다. 몇년 전에 열정적인 모 선배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있지만 그런걸로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지만 넘어가도록 한다.
보통 졸준위는 다섯 개의 스튜디오에서 의무적으로 2명씩 차출되어 10명 안팎으로 구성된다. 아마 반별로 자료 취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생긴 룰인 것 같다. 하지만 경험상 이렇게 모인 집단에서는 5명이나 10명이나 퍼포먼스에는 크게 차이가 없고, 그만한 규모의 팀의 전체적인 워크플로우를 잘 관리해서 최적의 결과물을 뽑아내는 역량이 있는 사람을 학부에서 찾기도 어렵다. 그래서 스튜디오와 상관없이 참여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로 구성하되, 이 일을 우선순위에서 높게 둘 수 있는 사람들로 팀을 짰다. 다같이 모인건 3월 중순 즈음이었다.

나는 디자인을 하는 것에는 서투르지만 기획에 대한 경험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아 전반적인 전시 기획에 참여했다. 초기에는 전시 자체에 대한 공감대를 만드는 일에 시간을 많이 썼다. 매년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이름의 전시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은 꽤나 독특한 전통이다. 반면 이러한 전통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난 전시들이 다음 전시에 있어 밀도 있는 레퍼런스로 작동하지 않으면 전통의 효용은 작아진다. 그래서 설정한 공동의 목표는 기존에 당연하게 반복해서 해오던 요소들을 전부 다시 보자는 것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전시를 만들게 될 사람들을 위한 의미 있는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서다.
장소 place
첫번째 요소는 장소였다. 기존에 해오던 전시 장소인 성균갤러리는 넓지만 낡았고 접근성도 떨어진다. 게다가 건축학과가 없는 인문사회과학캠퍼스 내에 있어서 건축학과의 학생들에게도 허들이 높다는게 가장 큰 단점이었다. 학부생과 교수진 그리고 동문이 한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연례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작품을 내야할 이유를 설득하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평가에 포함되는 마감은 건축학과가 있는 자연과학캠퍼스에서 하기때문에 전시를 위해서 수십개의 모형과 패널을 인문사회과학캠퍼스로 운송하는 멍청비용도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관 비용이라던지, 설치나 철거 스케줄 조정에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갤러리 운영측에서 배려를 해주는 것에 대한 효용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전시 장소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장소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성균갤러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성균건축전의 프리퀄prequel 전시를 하는 것이었다. 마침 전시공간을 지원받을 수 있는 공모가 있어 참여하기로 했다. 몇가지 전시 주제를 놓고 고민하던 시기여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완성된 기획안을 만들어보는 데에 효용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초기에 다같이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나중에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주제 hegemonie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겠지만 졸업전시회는 전시의 기획자가 주제와 분위기를 먼저 설정하고 작가 혹은 작품을 섭외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작가와 작품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관통하는 맥락을 읽어내야하는 전시다. 학부 졸업작품의 경우 각 개인은 물론이고 스튜디오마다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주제들도 고려해야 한다. 문제는 동문건축사회 섹션이다. 매년 동문건축사회에서는 자체적으로 작품을 모아 학부 졸업작품과 함께 전시한다. 사전에 전시예정작품의 리스트가 오긴 하지만 전시 당일까지도 어떤 작품이 얼마나 오게 될지 모르는데다가 작품 수가 적은 것도 아니라서 주제를 정하거나 배치를 할 때에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었다.

이런 관점에서 작년 성균건축전의 주제 ‘Different Directions’ 는 상당히 모범적이다. 학부생과 졸업생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서도, 학부 졸업작품 섹션을 위도와 경도라는 모티브로 잘 풀어낸 것 같다. 주제 자체가 이해하기 쉽고, 포스터라던지 사이니지 같은 전시 요소 디자인에 직관적으로 반영하기에 용이하다.

반면에 우린 더 선언적인 주제를 찾고 있었다. 그 자체로 우리가 해왔던 작업을 정의하면서도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명제 같은 것.

이 주제의 핵심은 주체성이다. 여기에서 주체성이라고 하면 특정 정치 체제에서 주장하는 그것과 다른, 개개인에 대한 존중의 의미다. 엄밀히 말하면 성균건축전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학부과정의 건축설계스튜디오라는 수업에서 진행한 결과물일 뿐이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만이 졸업생 개개인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 스스로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적어도 그러라고 말하는 전시를 만들고 싶었다. 뉘앙스가 다르긴 하지만 ‘If value then plan!’ 을 옮기자면 ‘당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세요!’ 에 가깝다.
보여주는 방식 presentation method
사실 주제보다 먼저 고민했던 건 보여주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졸준위 내부적으로도 기존에 해오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자는 공감대가 많았다. 그래야 내년부터는 답습이 아니라 선택을 할 수 있게 될테니까.
돌이켜보면 매년 전시의 동선이나 배치는 다르지만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은 늘 같았다. 전시장의 벽면을 작품들로 채우고 가운데를 오프닝과 연계프로그램을 위한 공간으로 비우는 방식이다. 이러한 배치의 장점은 동선의 방향이 정해져 있어서 한번에 많은 관객을 수용하거나, 선후관계가 있는 이야기를 순서대로 보여주고 싶은 전시에 유리하다는 점이다. 단점은 졸업전시회의 특성상 관람객이 지인인 경우가 많아, 작품의 위치에 따라서 불필요하게 긴 동선이 생긴다는 점이다.
반면에 우리는 관람객 스스로 주체적으로 전시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다. 관람객이 선택적으로 동선을 구성해서 자신만의 전시를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서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명확해진 상태에서 여러가지 대안을 고민할 수 있게 됐다.



이것저것 우겨넣긴 했지만 지금보니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다



초기 검토했던 안들에 비해 전달하려고 하는 바가 명확해서 이걸로 정했다.
결과적으로 2018 성균건축전이 이전의 전시들과 가장 다른점은 졸업생들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공간의 확장성이다.
전시장의 벽을 따라 나열된 패널과 모형이 개인에게 주어진 전시공간의 전부였다. 해마다 달라지는 졸업생의 수에 따라 공간이 넓어지고 좁아지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관람객의 입장에서 이미 지나친 작품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반면에 2018 성균건축전의 경우 개인의 전시공간이 중앙의 패널과 모형을 위한 모듈 이외에 전시장의 모든 벽과 공간으로 확장된다. 기존 전시의 공간 구성을 역전시켜 비워진 전시장의 벽과 바닥에 패널과 모형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큰 스케일의 도면, 스터디 모형, 레퍼런스, 영상을 전시한다. 관람객들은 이미 지나친 작품의 파편들을 계속해서 마주치게 되고,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인덱스가 파편들을 연결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관람객들은 전시장을 자유롭게 배회하며 자신만의 동선으로 또 하나의 작은 전시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도록 document
주제와 전시의 윤곽이 잡힐 때 즈음 전시 도록에 대한 방향도 어느정도 정해졌다. 사실 책자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이슈가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 졸준위에게 오프더레코드로 인수인계 해두었다. 요는 이전 예산안들을 검토하다보니 책자에 비정상적으로 많은 예산을 쓰고 있었는데 매년 맡기던 업체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게 아닐까 했다. 괜찮은 포트폴리오의 업체들 몇 군데에서 비교견적을 받아보니 아니나다를까 예산이 반으로 줄었다. 나머지를 운송비와 전시용 패널 출력 지원 비용으로 썼다.
다시 책자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전의 책자들을 보면 그 해의 전시 주제와 관련된 직접적인 내용은 거의 없고 사실상 작품 카달로그에 가깝다. 전시 도록에 전시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그래서 책자의 페이지도 전시 공간의 연장으로 보고 ‘If value then read!’ 라는 서브 프로젝트 개념으로 책자를 진행했다. 많은 지면을 할애할 수는 없지만, 전시를 보지 않은 사람도 어렴풋이나마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졸업작품들이 이야기하는 키워드들을 인덱스로 정리해서 시의성 있는 주제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고, 후반부에는 졸준위 대담도 네댓장 넣었다.
초기에 내부적으로 책자 디자인에 욕심을 냈지만 개인적으로 책자에 많은 리소스를 쓰는 것은 반대했다. 왜냐면 편집 디자인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책자에 들어갈 작품들의 로우 데이터를 취합하고 레이아웃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인 작업일게 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포스터와 전시 연계 프로그램 기획에 더 집중하는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 poster
포스터는 정말 어려웠다. 몇번이고 바꿨다. 정밀한 배색이나 레이아웃에는 자신이 없어서 주제의 슬로건 자체를 강조하는 볼드한 타이포그라피 형식을 스터디해보자고 했다. 결과적으로 단순 그리드의 조형을 기본으로 하는 유니코드 형태가 되었다.

전시장 바닥을 파란색으로 만들고 스터디 모형을 전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슬로건 형식의 주제를 시각화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리가 된 것 같다. 포스터 디자인이 전시 콘텐츠의 디테일을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예를 들면 ‘If value then copy!’ 섹션은 전시되는 작품들의 목차overview와 같은 공간으로, 각 작품의 초기 레퍼런스 사본copy을 전시한다. 이때 사본copy을 어떤 방식으로 전시할지에 대해 결정할 때 포스터를 연상케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는 식이다.

성균건축전 Graduation Exhibition
늘 그렇지만 지나간 프로젝트는 항상 아쉬운 점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 성균건축전에서 소기의 성과라고 할만한게 있다면 아마 아카이브일 것 같다. 꽤 오래전부터 gsapp이나 pratt을 보면서 구상하던 아이디어가 졸준위 친구들이 도와준 덕에 처음으로 구체화될 수 있었다. 지금은 나보다 훨씬 잘하는 친구들이 skkusoa를 만들고 있다. 정말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졸업준비위원회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글·사진
Cheif Editor
류제헌 Jeheon Rh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