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취준과 직장생활로 바쁜 1월, 백수로 데뷔한 이성경은 포르투갈로 2주 여행을 떠났다. 이번 시리즈에선 그곳에서 걸었던 장소들을 소개한다. 야근에 찌든 신입사원보다는 여행하는 내가 낫다는 핑계로 시작된 그녀의 건축기행. 개봉박두!






포르투갈 로드트립 ep. 1-1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늘 여행에는 60L짜리 배낭을 메는 프로 백패커다. 언제나 쇼핑은 짐을 늘리는 일이기에 엽서와 와인 외엔 여행에서 뭘 사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가족여행이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24인치짜리 커다란 캐리어가 할당된 것이다. 게다가 여행 직전, 인생 마지막 세뱃돈이 들어왔다. 본때를 보여줄 때가 오고야 만 것! 쇼핑리스트 23번까지 작성하고 비행기를 탔다. 마침 세일 시즌이었기 때문에 난 첫날부터 코트를 사고 그 이후로도 속속 들 히 털리고 말았지만, 빈 통장이 무슨 상관이람. 내 통장이 언제부터 차있었다고. 아쉽게도 위시리스트의 전부를 갖진 못했으나 아주아주 귀여운 것을 귀여운 가게에서 샀고,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사실 본 편은 건축이 아니라 무늬만 건축전공인 자의 쇼핑 하울이 본질이다.

리스본에선 이만큼 소개한다.



1.

서점 Ler Devagar 에서 산 엽서, 각 1€,
솔직히 타일과 고양이 조합은 치트키다.






책장을 넘기고 싶은 날엔, 서점 Ler Devagar

LX팩토리로 가는 길. 리스본에선 방심하면 예쁜 타일을 놓친다. 물론 난 방심하지 않았다.



서점이 위치한 LX팩토리는 폐업한 방직공장 단지를 문화, 업무공간으로 바꾼 지역이다. 다시 말해 도시재생 핫플레이스. 리스본의 성수동이라고 해서 가봤다. 성수동만큼 큰 동네는 아니고 ‘팩토리’라는 말 그대로 공장단지 정도의 크기였다. 거리를 쏘다녀보니 성수동과의 비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건물 내, 외부에서부터 차이가 느껴진다. 건물만 봐도 이 곳의 가게들은 대체로 아기자기하면서 현대적으로 꾸며놓은 편이고, 성수동 쪽이 좀 더 시간의 캐릭터가 살아있다. 또 안을 들여다보면 성수동은 판매 품목이 특정 몇 개에 치우쳐 있고 가게들의 색이 대체로 비슷한 반면, LX팩토리는 규모는 작지만 더 다채롭다.

LX팩토리의 흔한 까페 문짝.
이 동네는 참 카피들이 좋다. 저 문구 보고 바로 들어갔다.



가족들을 카페에 욱여넣어두고 ‘올라’를 30번쯤 외치며 모든 샵을 다 돌아다녔는 데, 업종이 가구부터 화장품까지 다양해서 재밌었다. 핸드크림도 바르고 옷도 입어보고, 목걸이도 해보면서 쇼핑을 해댔는데, 결과적으로 산 건 엽서밖에 없어서 사실상 아이쇼핑이 됐다. 이 동네는 귀여운 물건을 귀엽지 않은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점이 성수동과 비슷했다.

서점의 1층. 빼곡한 높은 책장이 문학소녀, 소년들을 자극시킨다.



그렇게 열심히 구경을 하던 중 들어간 서점 Ler Devagar. ‘천천히 읽기’라는 뜻으로 리스본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꽤 유명한 가게다. LX팩토리에서 가장 큰 샵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위 사진에는 바퀴만 나온 작품 ‘비행 자전거’ 덕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대해선 뒤에서 얘기하겠다. 한국 관광객들에겐 여기서 살 수 있는 엽서나 노트 등의 문구류로도 잘 알려져 있어 나 역시 여행 전부터 이곳에서 엽서를 사기로 결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엽서는 색감이 좋아 지갑을 열 수 밖에 없었고, 서점 자체는 책벌레로서 싫어할 수 없는 장소였다. 게다가 캐셔 언니 성격까지 좋아 대화의 즐거움까지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2층 펍. 한 남자가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작업 중이다.



이 곳 Ler Devagar는 중고서적과 신간을 같이 취급하는 서점으로, 동시에 카페와 펍, 전시공간까지 운영한다. 사람만 좀 적었어도 여기서 맥주를 마시는 건데. 홈페이지에 따르면 천장 높이 14m에 4층짜리 서점이라고 하는 데, 실제로 접근 가능한 층은 2층까지고 나머지 층은 천장을 싹 털어놔서 4층 규모라고 하는 게 맞는지 좀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공장을 리모델링해 만든 곳이다 보니 애초부터 층고가 높기도 하고, 파이프 비계로 만들어 놓은 2개 층의 전시공간까지를 말한 듯하다. 각 층의 층고는 높은 건물이었지만 생각보다 소리가 막 울린다거나 하지 않고,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섬유공장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고 하는 데 한국의 가장 힙한 카페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세계적인 트렌드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서점 내부에서 성수동의 그것과 같은 캐릭터가 또렷이 보이진 않았다. 살짝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유명한 서점답게 전시공간에 가면 조금 느낄 수 있긴 하다.

서점 내 최상단에 위치한 전시공간.
로봇과 방직기계, 피규어 등등 온갖 잡동사니가 잔뜩 섞여있어 정신이 하나도 없고 재밌다.



이 전시공간이야말로 서점의 하이라이트. 일단 이곳에 방직기계로 추정되는 거대한 기계가 배치돼있어 공간의 옛 모습이 약간이나마 상상이 되고, 계단을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온 카페의 전경이 다 보인다. 또한 3층에선 <Objectos Cinemáticos> 전이, 4층에선 <Pietro Proserpio – Love for Kinetic Art> 전이 영어 가이드와 함께 진행 중이다.
이 가이드가 핵심이다. 4층 전시는 수십 개의 로봇과 사진 등을 넣어 꾸며놨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계속 장난치면서 투어 시켜준다. 로봇도 한 10개쯤 작동시켜서 하나하나 설명해줘서 말을 몰라도 재밌다. 하지만 사실 난 그 설명이 너무 동화적이라 ‘무슨 이런 걸 농담이라고 하나’ 하고 오해한 채 도망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전시는 장난감 전시였고, 동화적인 건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 때 그 할아버지가 바로 로봇과 그들의 스토리를 만든 개발자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1층의 비행 자전거도 이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그 제페토 할아버지한테 도망쳐서 혼자 전시를 보고 있었는데. 너무 아쉽다. 숙소에 돌아와서 그의 인터뷰를 읽으니 멋있어서 더 아쉬웠다. 혹시나 방문하게 된다면 나처럼 도망가지 말라고 이렇게 남기는 바다.

LX팩토리 화장실의 세면대.
실제로 보면 거울없는 불편을 감수할 만큼 색감이 살아있고 힙하다.



서점을 비롯한 각종 샵을 돌아다닌 결과 분명 가볼만한 동네였다. 관광객 관점에서 성수동은 너무 커서 이 곳이 더 효율적으로 놀기에 알맞았다. LX팩토리 내의 가게 하나만 더 소개하자면 핸드메이드 액세서리샵을 꼽고 싶다. 모든 제품을 천연재료를 이용해 수공예로 만드는 곳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선글라스와 폰케이스가 주 품목이었는데 핸드메이드란 말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퀄리티가 높았고, 주인 오빠가 친절해서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당연하게도 가격이 웬만한 명품급이라 몇 개 써보고 굿바이를 외치는 수밖에 없었지만.
물론 이 외에도 LX팩토리에는 흥미로운 샵들이 즐비해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 걸맞는 흥미로운 사람도 많아보였다. 도시 내 다른 동네보다 좀 더 프레쉬한 느낌이랄까. 만약 당신이 리스본에 있고, 맥주 한 잔과 chillin’을 원한다면 이 곳은 아주 적합한 동네다. 혹시 내게도 다음이 있다면 지갑도 두둑히 해서 가리!


Info
Address: R. Rodrigues de Faria 103 – G 0.3, 1300-501 Lisboa
Open: 11am – 11pm (금요일은 새벽 1시까지)
Closed: Sunday



2.

양초집 Casa das Velas 에서 산 향초, 9€






제 잠옷은 향기인걸요, Casa das Velas Loreto

리스본 시내. 카몽이스 광장 인근으로, 쇼퍼홀릭이라면 10번 이상 거닐 길목이다.



어느 순간부터 향은 마지막으로 입는 외투가 돼버렸다. 시작은 마릴린 먼로에서부터 였을까. 새내기 여자애들에게선 마크 제이콥스의 ‘데이지’로 대표되는 단 내음, 여름의 이태원에선 하나같이 이솝의 ‘테싯’이다. 힙하다는 샵에서는 어김없이 그들 특유의 풀냄새가 느껴지고 백화점들은 애진작부터 1층 입구에 향수를 들이부었다. 인센스와 캔들은 왜 그리 선물하기도 좋은지. 하는 수 없이 나도 욕조에 들어갈 땐 꼭 향초를 켜는 인간이 돼버렸다. 마침 선물받은 향초의 수명이 다 된 탓에 이번 기회에 괜찮은 향초를 하나 사오기로 했다. “니가 언제부터 공주님이 됐냐” 라고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뭐, 어쩌라고.

일반적인 뚱뚱한 초 외에도 과일모양, 길쭉한 모양, 버섯모양 등 다양한 초가 진열돼있다.



Casa das Velas Loreto 는 프랑스 혁명의 시작 날에 개점한 200년이 넘은 수제 향초집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게 규모는 반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건재한 향기를 자랑한다. 문을 열면 강한 향이 퍼져 나와 여기가 뭐 하는 집인지 바로 알 수밖에 없다. 사실 이게 초를 고르는데에는 좀 방해가 됐다. 가게 냄샌지 제품 냄새인지 헷갈렸기 때문.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들어간 가게 내부는 아주 예뻤다. 색깔별로 진열된 다양한 초와 은은한 주광색 간접조명, 그 빛을 살짝 반사하는 오래된 나무가구까지. 양초집에 걸맞은 감성이란게 있다면 바로 여기였다. 손바닥만한 가게라 내부는 진열장과 데스크가 끝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대신 캐셔 테이블 뒤로 보이는 초 제작실이 아주 깊다. 슬쩍슬쩍 보이는 그곳이 알라딘의 동굴마냥 진짜 신비롭고 예뻤다. 할머니랑 친해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컬러별로 정렬된 이 집의 디피.
듣기로 가게 안쪽에서 꺼내주는 향초와 과일모양 초 외에는 향이 안나는 것이라고.



이곳에서 파는 초는 크게 세례용 초 VELAS DE BAPTIZADO 와 조명·장식 초 VELAS PARA ILUMINAÇÃO E DECORATIVAS로 나눠지는데, 후자가 이곳에서 수제로 만드는 초다. 향초 역시 후자에 속했다. 인기척을 내자 주인 할머니가 시향 키트를 들고나와 가게에 있는 열댓 개의 향초를 전부 시향 할 수 있게 해주셨다. 내 베스트 3픽을 꼽자면 Samarcanda 사마르칸트, Magnolia 매그놀리아 꽃, Folhas de Tomate 토마토 잎 향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원 사이즈였고 좀 컸다. 그래서 적당한 크기의 다른 향초를 사게 됐다. 내가 구매한 건 올리브 컬러라 다른 것들보다 이쁘기도 했고, 향도 초코향이라 해야하나 뭔가 여하튼 특이한 향이다. 그리고 9€짜리여서 21€인 다른 것들에 비해 싸기도 했다. 근데 그냥 큰 거 사 올걸. 지금 너무 아쉽다. 여러분은 나 같은 실수 하지 마시길. 여긴 캐시온리 가게였고, 난 현금이 부족했으며, 여기 또 오는 게 귀찮았다. 앞에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이게 가장 큰 이유다. 현금을 준비하는 게 답이다.

향초를 사면 이렇게 포장해준다.
자세히보면 1789년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있다.



이 가게 외에도 포르투갈에선 향초를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다. 비누가 포르투갈의 유명 특산품이라 비누가게가 많은데 대부분의 브랜드에서 향초도 같이 팔기 때문이다. Claus PortoCastelbel이 대표적이다. 만약 비누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면 향초를 사보는 것은 어떨까. 구매 결과 대만족 중이기 때문에 추천하는 바다.


Info
Address: Rua do Loreto 53, 1200-241 Lisboa
Open: 9am – 7pm
Closed: Sunday

<포르투갈 로드트립> ep. 1-2 에서 계속







credit

글, 사진
이성경 Sungkyung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