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How Building Die : About Extinction of Architecture / Sunhwan Kim

허물지 못하는 20세기

모든 존재는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결국 홀로 감당해야 하는 지극히 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삶 속에서 죽음을 현재화 하는 것은 개체의 상실을 채워주는 삶의 완성이다. <한 건물이 죽는 법; 건축의 소멸에 대하여>는 철거와 신축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프로 젝트이다. 오늘날 도시를 움직이는 현상들과 지표들을 바라보고 철거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재생과 철거

기억은 역사가 끝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오늘날 기억은 가치판단의 최종 기준이 되었고 20세기가 남기고 간 것들은 당연스럽게도 기억해야 할 것이 되었다. 재생은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정당성을 획득”하였고 “낡고 쇠락한 주거와 폐허가 된 산업시설들은 진정성의 보고”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기준과 담론은 부재한 상황이다.


폐허의 이미지는 숭고의 감정과 함께 소비의 대상이 되었고 낭만은 새로운 동력원이 되었다. 반공주의는 ‘남산 제 모습 가꾸기’와 ‘양성화’라는 명목으로 공원을 해체하고 5백동의 무허가 판잣집들을 철거하였다. 그리고 그곳은 근대화를 위한 국민교육장으로 재편되었다. 90년대 일어난 일련의 참사들은 성장위주의 정부에 오욕이 되었고 붕괴의 아픔들은 역사적 치욕의 상징인 총독부 철거를 통해 잊혀졌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아픔으로 오버랩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 기형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재개발과 재건축은 그곳을 살리기 위하여 기존에 살아있는 것들은 죽일 수 밖에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가져왔다.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이 안전하지 못하는 것을 자축하는 플래카드들은 철거는 더 밝은 미래를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멀쩡히 존재하는 것들은 사회적으로는 사망선고를 받아 이미 죽은 것이 되었다. 자본과 권력 앞에서 철거는 ‘필요악’이 되었고 쇠퇴와 낙후는 단숨에 ‘절대악’이 되었다.

20세기는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낭만을 획득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강제적 사망선고를 통하여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재생과 철거는 서로 극단에 위치하였지만 오늘날, 도시를 움직이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그와 평행하게 20세기 근대의 서울은 제도의 변화와 궤를 같이했다. 실제 건축법과 도시계획 개정의 역사 대부분은 건축허가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것은 개발 논리와 신속한 행정처리, 운용에서 큰 폭의 직권부여, 규제 중심의 단순화는 현실적 문제해결이라는 획일적인 해결방법에 의존한 결과였다. 건축법은 말 그대로 ‘건축建築’을 다루고 있다. 오늘날의 제도는 여전히 20세기 생산 위주의 건축에 머물고 있다. 이는 일방향적이고 생산 중심의 논리로 형성되어온 건축법과 도시계획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적 현대의 자장 속에 맴돌고 있다.

대량생산과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주도의 기치아래 건축은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한국 건축지형의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형성되었고 절대적으로, 양적으로 우세한 ‘모더니티-버내큘러’는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조건들이 빚어낸 총체로서 용도, 목적, 경제성, 제도 등을 고려한 일반적인 기준들로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그 어떤 것보다 시대의 조건들과 근대가 경계 지웠던 것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이들은 도시의 표류물들로서 눈에 잘 띄지만 역설적이게도 비가시적이다.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작자 미상의 익명의 존재들은 어느 순간 철거되어 없어져도 특별히 놀랄만한 것이 아닌, 어쩌면 죽음에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다.

How old Seoul is

도심의 공동화는 빈집의 증가를 가져왔고 노령화된 건물들은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장기간 방치되고 있다. 이들은 환경미관과 지역 쇠퇴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아직 멀쩡히 존재하는 건물들은 강제로 사망선고를 받고 있다.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이 무너지고 부수는 일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삶과 죽음의 영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공사중단 장기방치 건축물들은 철거와 신축만의 방법이 전부였던 건축의 어두운 이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도시 속 건물의 죽음은 소멸의 논리보다는 여전히 건축의 논리로 다루어지고 있다. 철거에 대한 방법론이나 담론의 부재는 계속해서 죽음을 어색하고 미숙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죽음을 회피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건축은 어떻게 짓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죽는 법

장례는 결국 살아있는 사람들의 잔치이다. 장례식은 “개체의 죽음에 대한 하나의 정리이자 버림이며 비움”이다. 가까운 친인척부터 시작하여 동네 사람들이 포함하여 장례를 완성하는 과정은 죽음보다는 삶의 완성에 가깝다. 장례가 결국 산자들을 위한 의식인 것처럼, 건물의 장례식은 보편적인 공간을 덜어내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사회적이고 공공의 가치를 기여하는 일종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의 죽음이란 프로그램의 죽음이다. 프로그램의 죽음은 사실상 사용가치가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경계 지웠던 한 건물의 공간들은 여전히 남겨져 있다. 이 원시의 공간들은 오늘날의 도시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변모하고 있다.

건물의 소멸은 따라서 프로그램 이후에 무엇이 올지에 대해, 그리고 철거를 부정적으로 단정지은 과거의 인습에 맞서 다양한 가능성들을 보여줄 것이다.

한 건물의 소멸은 건물의 물리적 요소를 덜어내면서 시작한다. 물리적 경계를 덜어내면 이내 곧 제도, 기능, 구조, 형태, 공간 등의 비물리적인 경계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소거는 이렇게 물리적이고 비물리적인 ‘경계들의 단면’을 드러낸다.

일종의 해부학으로서 소거법은 용도와 목적, 경제성 등으로 완성되어진 ‘표준의 것들’, ’모더니티-버내큘러’ ,’작자미상의 건축’ 들을 소멸시킨다. 그 과정에서 자기-완성적인 구조들은 와해되고 계속해서 모호하고 잠재적인 해프닝을 끌어들인다.

소거법

소거의 방법론의 핵심은 바로 ‘경계’들을 허물면서 나오는 공간을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가치로 전환시키는데 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철거업체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져선 안될것이라는 점이다. 단절적이고 순간적이고 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인식으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과정의 건축으로서 느린 철거를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건강하고 유기적이고 생산적인, 더 많은 개념들을 포함하는 광의의 철거이다. 따라서 건물의 장례는 죽음의 장면을 길게 늘리고 그로 인해 도시가 품지 못한 다양한 가능성들을 실험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주목 받고 있는 파빌리온에서 찾게된다.

건물을 지으면서 자신의 철학을 실험하였던 이전 세대의 건축가들과는 다르게 오늘날의 현대 건축가들은 파빌리온을 통해서 실험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짧은 설치기간과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소통 수단의 장치”로서 파빌리온은 현대건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건축의 한계에서 벗어나 재료와 구조의 실험적인 구축, 공공성에 대한 탐구는 더이상 파빌리온이 건축의 주변부에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일상은 다양한 순간들로 구성되며 일화들의 반복은 모여 서사를 이루게 된다. …
그러나 일상은 게임과 사랑, 일, 휴식, 분투, 지식, 시 등등의 다양한 순간들로 구성
되며, 일시성과 반복은 우리가 순간과 맺는 관계를 정의하는 핵심 요소다 “
Bernard Tschumi